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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장의 숲

서사의 위기_한병철

by 몬떼꼬레아나 2025. 6. 18.

 

 

1. 이야기에서 정보로

스토리는 서사가 아니다. 스토리, 즉 정보는 끊임없이 등장하는 다음 스토리로 대체되어 사라진다. 반면 서사는 나만의 맥락과 이야기, 삶 그 자체다. 나의 저 먼 과거와 현재, 미래를 연결하기에 방향성을 띤다.  왜 우리는 삶의 의미를 갈망하면서도 인내심을 가지고 자신의 이야기에 귀 기울이지 못하는지, 왜 끝없는 불안과 공허에 빠지는지, 그래서 나의 서사는 무엇인지 깊이 사유하게 한다. 서사 속에 존재의 닻을 내리고 싶다면 코앞의 이슈를 좇는 데서 한 발짝 벗어나 먼 거리에서 시선을 유지해야 한다. 이는 서사의 회복뿐만 아니라 타인과의 진정한 소통을 가능케 한다.

 

서사, 즉 이야기에 내재해 있는 전승적 지식은, 정보와는 완전히 다른 시공간적 구조로 되어 있다. 일단 지식은 ‘멀리서’온다. 이러한 원격성은 지식의 본질적 특성이다. 또한 원격성의 점진적 해체는 근대의 특징이다. 벤야민에 따르면 이야기는 ‘모든 걸 내보이지 않는다.’ 이야기는 ‘그 힘을 내면에 모은 채 보전하다가 오랜 시간이 지난 뒤에도 다시 펼쳐낼 수 있는 것’이다.

 

정보는 오로지 찰나의 순간에만 작동한다. 영구한 발아력을 지닌 씨앗이 아닌, 티끌이나 다름없다. 정보의 쓰나미는 주의를 파편화한다. 그것은 본질적으로 이야기하기와 귀 기울이기에 필요한 관조적 머무름을 방해한다. 우리는 알고리즘으로 움직이는 블랙박스의 손에 내맡겨진다. 인간은 제어하고 착취할 수 있는 데이터 기록으로 축소된다. 

 

2. 경험의 빈곤

경험은 한 세대에서 다른 세대로 전승된다는 특징이 있다. 벤야민은 근대에 만연한 경험의 상실을 비탄했다. 지혜는 이야기되는 진리다. ‘이야기하기 예술은 끝을 향해 가고 있다. 진리의 서사적 측면인 지혜가 사멸하고 있기 때문이다.’ 시간은 현재의 좁은 궤도로 단축된다. 여기에는 시간적 폭과 깊이가 없다. 우리는 과거의 구제를 수행해야 한다. 과거를 현재에 끌어내어 엮고 현재 안으로 계속해서 작용하게 하는, 즉 소생하게 만드는 서사적 장력이 필요하다.

 

정보는 시간을 파편화한다. 주의도 파편화한다. 정보는 머무름을 허용하지 않는다. 가속화된 정보 교류 속에서 정보는 또 다른 정보를 사냥한다. 스냅챗은 디지털로 이루어지는 찰나의 소통을 몸소 보여준다. 이들은 기억을 위해서가 아닌, 소통을 위해 사용된다.

 

인간의 기억은 선택적이다. 그게 바로 데이터 기록과의 차이다. 디지털 저장소가 첨가적이고 누적적으로 작동하는 반면, 인간의 기억은 서사적으로 작동한다. 이야기는 사건의 선택과 연결에 기반한다. 즉, 선택적으로 진행된다. 기억에는 필연적으로 틈이 존재한다. 기억은 가까운 것과 먼 것을 전제한다. 경험한 모든 것이 간격 없이 현재로 존재한다면, 즉 가용한 상태라면 기억은 사라지는 것이다. 

 

3. 설명되는 삶

행복은 하나의 시점에 국한되는 사건이 아니다. 행복은 과거까지 닿아 있는 긴 꼬리를 갖는다. 그것은 살면서 거쳐온 모든 것을 먹고 자란다. 우리는 과거의 구제를 수행해야 한다. 과거를 현재에 끌어내어 엮고 현재 안으로 계속해서 작용하게 하는, 즉 소생하게 하는 서사적 장력이 필요하다. 행복은 구원과 공명한다. 모든 것이 우리를 최신성의 광란으로 몰아넣는 곳, 우연성의 폭풍우 한가운데에 서있는 사람에게 행복은 있을 수 없다.

 

디지털화는 시간적 위축증을 악화시킨다. 실제성은 좁은 현실 폭을 가진 정보로 부서진다. 정보는 놀라움의 자극으로 생명을 유지한다. 정보는 시간을 파편화하며 머무름을 허용하지 않는다. 가속화된 정보 교류 속에서 정보는 또 다른 정보를 사냥한다 트위터, 페이스북, 인스타그램, 틱톡, 스냅챗 같은 디지털 플랫폼은 이야기 매체가 아닌 정보 매체다. 서사적으로가 아닌 첨가적으로 작동한다. 이곳에서 삶은 사건들은 단순한 정보로만 취급된다. 그것들로부터 어떠한 긴 이야기도 직조되지 않으며 서사적 맥락도 찾아볼 수 없다. 놀이터로서의 스마트폰은 디지털 피놉티콘임이 드러났다. 더 이상 비밀은 없으며 인간은 기록 안에 사로잡혀 있는 상태다.

 

인간의 기억은 선택적이다. 그게 바로 데이터 기록과의 차이다. 디지털 저장소가 첨가적이고 누적적으로 작동하는 반면, 인간의 기억은 서사적으로 작동한다. 이야기는 사건의 선택과 연결에 기반한다. 즉, 선택적으로 진행된다. 기억에는 필연적으로 틈이 존재한다. 기억은 가까운 것과 먼 것을 전제한다. 경험한 모든 것이 간격 없이 현재로 존재한다면, 즉 가용한 상태라면 기억은 사라지는 것이다. 

 

4. 벌거벗은 삶

서사의 위기인 근대의 실존적 위기는 삶과 이야기가 산산이 와해된다는 데서 발발한다. 이 위기의 문제는 사느냐, 아니면 이야기하느냐를 선택해야 한다는 점이다.

 

후기 근대의 삶은 특히 적나라하다. 이 삶에는 이야기 환상이 빠져 있다. 정보는 이야기로 연결될 수 없다. 따라서 사물은 서로 분해된다. 서사의 경계는 우리의 실제 삶을 초월하지는 않는다. 무조건 건강한 상태를 유지하거나 또는 무조건 최적화되는데 초점이 맞춰져 있는 살아남기의 삶이다. 건강과 최적화를 향한 히스테리는 벌거벗고 의미가 제거된 세계에서만 가능하다. 최적화는 기능 아니면 효율에만 해당하는 프로세스다.

 

디지털화된 후기 근대에 우리는 끊임없이 게시하고 좋아요를 누르고 공유하면서 벌거벗은, 공허해진 삶의 의미를 모르는 척한다. 소통 소음과 정보 소음은 삶이 불안한 공허를 드러내지 못하게 만든다. 내면의 공허에 직면한 는 스스로를 영구히 생산해 낸다. 셀카는 텅 빈 자기의 복제다.

 

5. 세계의 탈신비화

 이야기에는 여유가 필요하다. 가속화된 소통 속에서는 이야기할 시간, 즉 참을성이 없다. 정보만 교환될 뿐이다. 그러나 여유가 있는 곳에서는 모든 것이 이야기의 동기가 된다 이야기와 기억은 상호 의존적이다. 분절된 현재에만 몰두하는 사람은 이야기를 할 수 없다.

 

이야기하는 능력의 상실은 탈신비화에 책임이 있다. 탈신비화란 사물들에게서 신비로움이 사라진 것으로 눈앞의 존재를 이루는 날것의 현사실성은 이야기를 불가능하게 한다. 현사실성과 서사성은 상호 배타적이다. 사물이 인과관계를 벗어나 서로 관계를 맺고 비밀을 교환하는 세계는 신비롭다. 그러나 인과성은 기계적이고 피상적이다. 신비롭거나 시적인 세계관계는 인간과 사물이 깊은 공감으로 연결된 관계다. 아우라는 곧 바라보는 대상에서 생겨난 시선의 거리. 친밀하게 바라보면 사물들은 그 시선에 응답한다. 관찰된 존재 또는 관찰하고 있다고 생각하는 존재는 시선을 열어낸다.

 

정보에는 먼 거리도, 폭도 없다. 정보는 거친 돌풍도 눈부시게 반짝이는 햇빛도 담지 못한다. 정보에는 아우라적 공간이 없다. 그렇게 정보는 세계를 탈아우라화하고 탈신비화한다. 그러한 순간에 언어는 정보로 수축하면서 아우라를 완전히 상실한다.

 

6. 충격에서 ‘좋아요’로

넷플릭스의 시대에는 아무도 영화와 관련해 충격의 경험을 말하지 않는다. 넷플릭스 시리즈는 강조된 삶의 위험에 상응하는 예술 형식이 결코 아니다. 그보다는 빈지뷰잉Binge Watching,* ( 짧은 시간 안에 여러 에피소드를 한 번에 보는 것. ‘정주행’에 해당하는 신조어 ) 즉 생각 없는 시청이 시리즈 소비를 특징짓는다. 관찰자는 마치 소비 가축처럼 살찌워진다. 빈지뷰잉은 디지털화된 후기 근대의 지각 양식으로 일반화할 수 있다.

 이러한 충격에서 ‘좋아요’로의 전환은 신체 기관의 변화에서도 원인을 찾을 수 있다. 근대 사회에서는 늘어가는 자극 홍수를 충격으로 지각했을 수 있다. 그러나 시간이 흐르면서 우리의 신체 기관은 늘어난 자극량에 적응한다. 따라서 지각은 점차 둔해진다. 자극 방어가 일어나는 뇌피질은 흡사 굳은살로 뒤덮여 간다. 의식의 가장 바깥층은 경화되고 ‘무기無機’의 상태로 변해간다.

7. 이야기로서의 이론

빅데이터는 사실상 설명하는 것이 없다. 빅데이터에서는 사물들 사이의 상관관계만이 파악된다. 그러나 이러한 상관관계는 지식의 가장 원시적인 형식이다. 상관관계에서 얻을 수 있는 깨달음은 없다. 빅데이터는 사물이 왜 그렇게 서로 연관되어 있는지는 설명할 수 없다. 인과적 맥락도, 개념적 맥락도 생성되지 않는다. ‘어째서Wieso’가 ‘개념이 결여된 그것이 그렇다Es-ist-so’로 완전히 대체된다.

이야기로서의 이론은 사물들을 관계성 안에 집어넣은 후에도 왜 그렇게 관계되어 있는지 설명하는 질서가 있다. 이론은 사물을 이해하게 해주는 개념적 맥락을 발전시킨다. 빅데이터와 반대로 이러한 질서는 우리에게 지식의 가장 고차원적 형식, 즉 이해를 제공한다. 이는 사물을 개념화하고 이해할 수 있게 하는 종결 형식이다


8. 치유의 스토리텔링

모든 병은 내부의 막힘을 드러내며, 이 막힘은 이야기의 리듬으로 해제할 수 있다. 이야기하는 손은 긴장, 정체되어 막힌 것, 경화된 것을 풀어준다. 그리고 사물을 다시 안정시킨다. 즉 다시 흐름 속으로 돌려보낸다. 작가 미하엘 엔데Michael Ende의 『모모』는 경청만으로 사람들을 치유할 수 있음을 보여준다. 모모에게는 시간이 많다. “시간이야말로 모모에게 많은 유일한 것”이다. 모모의 시간은 다른 사람들에게 가치 있게 쓰인다. 타자의 시간이 좋은 시간으로 작용한다. 모모는 이상적인 경청자다.  경청에서 중요한 것은 전달되는 내용이 아니라 사람, 즉 타자가 누구인가다. 모모는 자신의 깊고 다정한 시선을 통해 타자를 그 사람의 타자성 안에 그대로 둔다. 이는 수동적인 상태가 아닌 능동적인 행위다. 


9. 이야기 공동체

 소셜 네트워크 서비스의 ‘스토리’도 사람들을 끊임없이 고립시키고 있다. 이야기와 달리 스토리는 친밀감도, 공감도 불러내지 못한다. 이들은 결국 시각적으로 장식된 정보, 짧게 인식된 뒤에 다시 사라져 버리는 정보다. 이들은 이야기하지 않고 광고한다. 주목을 두고 벌이는 경쟁은 공동체를 형성하지 못한다. 스토리셀링으로서의 스토리텔링 시대에 이야기와 광고는 구분하기가 불가능하다. 이것이 바로 지금의 서사의 위기다.

 


10. 스토리셀링

삶은 이야기다. 서사적 동물animal narrans인 인간은 새로운 삶의 형식들을 서사적으로 실현시킨다는 점에서 동물과 구별된다. 이야기에는 새 시작의 힘이 있다. 세상을 변화시키는 모든 행위는 이야기를 전제한다. 스토리텔링은 오로지 한 가지 삶의 형식, 즉 소비주의적 삶의 형식만을 전제한다. 

 

이야기는 사회적 응집성을 만든다. 이야기는 의미를 제공하며, 공동체를 형성하는 가치를 전달한다.